최근 부쩍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라는 질문을 되뇌이고 되뇌였었는데, 굉장히 명쾌한 해답을 C.S.Lewis느님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발견하였다. 솔직히 순전한 기독교를 거의 10년째 매년 1회~2회씩 읽고 있는데, 최근 다시 읽기 전까진 이 대목을 기억해내지 못했었다. 잊지 않고자, 그리고 공유하고자 여기에 옮겨두기로 했다.


순전한 기독교 - C.S. Lewis

139page, 기독교인의 행동 

(전략)


신약성경은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의 모습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분명한 단서는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단서만 보아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의 내용을 알 수 있지요.


우선 성경은 그 사회에 놀고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하며, 더 나아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그런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더 분별없는 광고는 더구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회에는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하거나 으스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 사회는 요즘 말로 ‘좌파’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는 언제나 순종 – 우리 모두가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그리고 존경심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것은 상당히 인기 없는 발언일 테지만) – 을 강조합니다.


셋째로 이 사회는 유쾌한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노래와 즐거움이 가득 찬 곳으로서 걱정이나 근심을 악한 일로 여깁니다. 정중함은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약성경은 ‘참견쟁이들’을 싫어합니다.


만일 그런 사회가 정말 있어서 여러분이나 제가 찾아갈 수 있다면, 아주 기이한 인상을 받고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의 경제생활이 아주 사회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가정생활과 예의범절은 오히려 구식이라고 – 심지어 형식 중심적이며 귀족적이라고 – 느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들은 각자 있어도, 그 사회 전체를 좋아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이라는 기계의 전체 설계도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설계도에서 이탈했고, 원래 설계도를 변경한 자신의 설계도야말로 진짜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에는 이런 반응이 거듭 나타날 것입니다. 즉 누군가 거기에서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만, 오직 그 부분만을 골라낸 후 나머지는 버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제가끔 자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의 이방인이었던 그리스인과 구약시대의 유대인,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로서, 현재 우리의 경제 제도가 완벽하게 거스르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가르친 그 교훈이란 바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 – 이른바 투자 – 은 우리 전체 경제 제도의 근간입니다. 물론 우리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세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자(당시 용어로는 ‘고리대금’) 받는 것을 금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식회사를 예견하지 못한 채 그저 개인적인 고리대금업자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제가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제 학자가 아닌 저로서는 현 상태의 책임이 투자 제도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경제학자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위대한 세 문명이 현대 생활 전체의 토대를 이루는 바로 그 부분을 한결같이 비난했다는 점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군요.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를 그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자선 –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일 – 은 기독교 도덕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양과 염소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유를 보면 마치 자선이 모든 것을 판가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에 어떤 이들은 자선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그런 가난한 자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기독교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는지는 일괄적으로 정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안전한 기준은 우리가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수입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안락한 생활과 사치품과 오락 등에 지출하는 만큼 우리도 그런 일에 돈을 지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양이 너무 적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선에 쓰는 비용 때문에 가계가 빠듯해지거나 제한 받는 일이 전혀 없다면 너무 적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고 싶지만 자선에 돈을 쓰느라 못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선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친척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회사 직원들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책임 아래 두신 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도우려면 여러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 – 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입니다. 이 두려움이 유혹이 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부심이 자선의 방해꾼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겉으로 후하게 보이는 일(팁을 주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정작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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